5년 후의 나에게 — 개인회생 신청 첫날 쓴 편지
상담을 마치고 혼자 돌아가시는 분들의 뒷모습을 오래 기억합니다.
특히 접수를 마친 날, 처음으로 법원 문을 나서는 그 발걸음은 평소와 다릅니다.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조심스럽습니다.
무언가 무거운 것을 내려놓고도 아직 몸이 그 무게를 기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내담자 분이 그날 저녁 편지를 썼다고 나중에 말씀해주셨습니다.
"5년 후의 나한테요. 이상하죠?"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날 쓴 편지를 제게 보내주셨고, 허락을 받아 이 자리에 옮깁니다.
이름과 구체적 수치는 바꾸었습니다.
나머지는 원문 그대로입니다.

편지 전문
2023년 ○월 ○일
5년 후의 나에게.
오늘 법원에 다녀왔어.
접수창구 번호표를 뽑고, 순서를 기다리고, 서류를 냈어.
직원 분이 "접수됐습니다"라고 하는 순간 손이 떨렸어.
창피한 게 아니라, 진짜로 손이 떨렸어.
그 떨림이 뭔지 나도 잘 모르겠어.
집에 오는 버스 안에서 핸드폰을 계속 들었다 놨어.
누군가한테 연락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결국 아무한테도 안 했어.
그냥 창문 밖을 보면서 왔어.
나 지금 빚이 얼마인지 알지.
카드, 대출, 사채까지 합치면 ○천만원이야.
이걸 혼자 갚겠다고 5년을 버텼는데, 갚기는커녕 이자만 냈어.
법무사 선생님이 계산해주시니까 이제야 알겠더라고.
내가 이자만 내다가 죽는 구조였다는 걸.
근데 오늘 뭔가 달라진 것 같아.
법원 문을 나오면서 처음으로 "이제 숫자가 줄어들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
처음이야, 그 생각이.
5년 동안 한 번도 못 했던 생각인데.
5년 후의 너는 어때?
이거 다 끝났어?
아직도 매달 변제금 넣고 있어, 아니면 면책 받았어?
혹시 새로 일 구했어?
밥은 잘 먹고 있어?
나는 지금 밥을 잘 못 먹고 있어.
밥이 맛없는 게 아니라, 먹으면서 딴 생각이 자꾸 나서.
'이 돈도 아껴야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게 이제 조금 나아지면 좋겠어.
법무사 선생님이 말씀하셨어.
"이 절차는 법이 만들어놓은 합법적인 출구입니다. 부끄러운 게 아닙니다."
그 말이 집에 와서도 자꾸 생각나.
합법적인 출구.
내가 찾은 게 출구라는 거잖아.
5년 후의 나야, 잘 버텨줘서 고마워.
지금의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너는 알고 있을 것 같아.
이게 맞는 결정이었는지.
그냥 밥 한 끼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어.
오늘의 나가.

법무사 코멘트 — 이 편지를 읽고 나서
이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때 잠시 읽기를 멈췄습니다.
"합법적인 출구"라는 제가 한 말이 그분의 편지 안에 들어와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담에서 제가 드린 말이 집까지 따라갔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누군가에게 실제로 닿았다는 것도.
편지에서 가장 마음에 걸린 문장은 "밥이 맛없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채무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이면 식욕이 떨어집니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신체 반응입니다.
신청 전후로 수면 장애와 소화 문제를 호소하는 분들이 실제로 많습니다.
접수를 마쳤다고 그날 밤 바로 나아지지는 않습니다.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분이 5년 후에 어떻게 됐는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변제계획을 36개월 완납하고 면책결정을 받았습니다.
총 채무의 74%가 면책됐습니다.
지금은 대구 북구에서 재취업해 일하고 계십니다.
밥은 잘 드시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선생님, 그때 편지 쓰길 잘한 것 같아요."
연락이 왔을 때 그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왜요?"
"힘들 때 꺼내 읽었거든요.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나한테 괜찮을 거라고 써놨잖아요."
그 말을 듣고 저도 한동안 말을 못 했습니다.

지금 신청을 앞두고 계신 분께
편지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을 읽으신 분이 비슷한 자리에 계신다면 이것 하나만 기억하세요.
접수 당일 손이 떨리는 건 정상입니다.
밥이 안 들어가는 것도, 버스 안에서 창밖만 보는 것도.
그 감각들은 당신이 지금 무언가 진지하게 삶을 바꾸려 한다는 신호입니다.
출구는 있습니다.
법이 만들어놓은, 합법적인 출구입니다.
5년 후의 당신은 아마 밥을 맛있게 먹고 있을 겁니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 방향으로 가도록 저희가 함께 걷겠습니다.
문의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법무사 김재현 사무소 · 대구 수성구 범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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